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치 독일 (문단 편집) == 역사적 손실 == [[체코]] 또한 특유의 공업 때문에 무기 생산 기지용으로 노예 수준의 취급을 받긴 했으나 절멸 정책은 이루어지 않았다. 그러나 나치 독일이 [[동방식민운동|독일 민족의 역사적 진출 방향]]이라는 이유로 처음부터 [[레벤스라움]]의 중심지로 설정했던 [[동유럽]]이야말로 본격적인 강제 추방, 집단 학살, 노예화 삼박자의 [[제노사이드]] 정책의 중심지가 되었다. 예외적으로 [[크로아티아]]나 [[발트 3국]][* 특히 [[리투아니아]]에 가혹한 정책이 펼쳐졌다. 게네랄플란 오스트에 의하면 절멸될 리투아니아인 비율은 85%에 달하였다.]처럼 어쩌다 히틀러 눈에 들어서 피해를 면하고 우등국민 취급을 받거나 [[헝가리]]처럼 대전 전부터 최우방인 국가도 있었다. 역설적인 점은 이 [[제1차 세계 대전]] 이전에는 [[오스트리아-헝가리]], [[독일 제국]], [[제정 러시아]]가 분할하고 있었던 중동부 유럽은 실제로 중세 이후로 독일계 이주민들을 대거 받아들이고, 지속적인 문화적, 경제적 교류를 따라 2차대전 이전만 하더라도 [[독일어]]가 인텔리 계층의 보편 언어로 대접 받을 정도로 독일의 문화적 영향력이 깊숙한 곳이었다. 그러나 2차대전의 시발점이 된 단치히(지금의 [[그단스크]])만 하더라도 전후 재건 과정에서 일부러 '독일색'이 나는 건물들은 다 싸그리 밀어 버리고 죄다 '폴란드 민족 전통적'이라고 판단된 디자인으로 구시가지를 다시 지었을 정도이다.[*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그단스크는 여전히 독일풍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. 그만큼 그단스크는 폴란드 민족주의 성향인 이들조차 독일 문화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지역이었다.] 종교적인 면에서도 [[얀 후스|독자적인 종교개혁 역사를 갖고 있는]] 체코 정도를 제외하면 [[아일랜드]] 공화국과 비슷하게 [[종교개혁]][* 특히 [[루터교회]]]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않은 편이다. 전후 독일인들은 심지어 나치와 전혀 관계 없는 수백 년 전의 [[프로이센]]의 역사마저도 군국주의의 색채가 짙으며, 민족주의를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[* 실제로 이 점과 반공주의가 프로이센 군부와 나치당의 공통점이었다. 그러나 이걸 빼면 둘의 사이는 매우 나빴다. 단적인 예로는 군부의 독일 국방군과 나치당의 슈츠슈타펠 간의 불화가 있다.] 제대로 역사 교육을 시키는 걸 학교에서 주저할 만큼 철저하게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거세되어 버렸다. 게다가 근대 독일 제국의 발상지인 오더-나이세선 이동의 모든 영토를 상실 했으므로 독일인의 영역은 중세의 [[동방식민운동]]이 이루어지던 12세기 즈음으로 축소 되고 말았다. 독일인의 생활권(Lebensraum)을 확보하고자 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지만 그 결과 천년에 걸쳐 확보한 영토를 전부 상실 했을 뿐더러 여기엔 중세 독일기사단의 영토였던 동프로이센까지 포함 되어 독일이라는 나라가 그 때까지 가지고 있던 정체성을 통째로 잘려나가 버렸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